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7세 (문단 편집) === 임박한 파국 === [[1065년]] 10월부터 1년 7개월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있던 [[콘스탄티노스 10세]]는 마침내 향년 62세로 사망했다. 그는 치세 내내 [[동로마군|군대]] 지휘관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작업에 골몰하였으며 동시에 국방을 위해서 기존의 민병대(Themata)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. 그러나 그 결과는 [[아니#s-2]](Ani) 지역의 자체적 방위 시스템이 유목민들을 상대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것만 입증한 채 실패했다. 콘스탄티노스는 마침내 아내 [[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|에브도키아]]와 아들 미하일에게 자리를 넘겨주면서 [[군벌|군인 정치가]]가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내에게 [[재혼]]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낸 채 사망했다. 당시 18세였던 미하일 7세보다는 모친 에브도키아가 국정을 주도했다.[* 현대 역사가들은 에브도키아를 단순한 섭정이 아니라 [[여제]]로 보기도 한다. 자세한 내용은 [[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]] 문서 참고.] 그녀는 딱히 정치에 있어서 오점을 남기지는 않은 것으로 기록된다. 하지만 당시는 동방의 방어선 중 [[아르메니아]] 일대에 구멍이 뚫린 상태여서 이미 [[소아시아]] 곳곳이 [[아비규환]]에 휩싸이고 있는 상태였다. 에브도키아는 계속해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. 결국 에브도키아는 [[미하일 프셀로스]]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로원과의 협의 끝에 유능한 지휘관 중 한 명과 혼인하여 국난 타개책을 세우기로 결정했다. 논의 끝에 그 대상은 [[로마노스 4세|로마노스 디오예니스]]로 낙점되었다. [[1066년]] ~ [[1067년]] 당시 북방 [[다뉴브 강|이스트로스 강]] 유역의 방위를 통괄하는 지휘관으로서 남침한 [[페체네그]] 군대를 크게 패배시켜 추앙을 받고 있던 로마노스는 1067년에 반란을 꾀하다가 체포되어 [[사형]] 언도까지 받은 뒤, 에브도키아와의 만남을 통해 놀랍게도 감형 뿐만 아니라 바라고 바라던 황제의 자리까지 받게 되었다. 그리하여 에브도키아는 로마노스에게 제위를 주고, 로마노스는 [[두카스 왕조]]의 존속을 보장하며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는 것을 거래하였다. 그렇게 1068년 1월 1일, 두 사람은 혼인과 동시에 [[대관식]]을 치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